목련이 피기까지 / 박용일展 / 스페이스 크로프트_SPACE CR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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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rt 댓글 0건 조회 4,421회 작성일 09-03-11 12:11
전시기간 ~
전시장소명

목련이 피기까지

박용일展 / PARKYONGIL / 朴鎔一 / painting

2009_0220 ▶ 2009_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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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일_종이배 풍경_캔버스에 유채_182×259cm_2009


초대일시_2009_0220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pm~06:00pm


스페이스 크로프트_SPACE CROFT
서울 종로구 평창동 98-3번지
Tel. +82.2.391.0013
www.spacecroft.com






파괴된 시간과 공존의 질서 

모호한 공간 위에 거대한 종이배가 떠 있는 박용일의 그림은 언뜻 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탕 면이나 그 위에 얹힌 종이배에 드러난 풍경은 몇 십 년째 쉴 새 없이 (재)개발 중인 서울 근교의 풍경들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황야, 또는 누더기처럼 나타나곤 하는 그곳의 대지는 계속되는 개발의 삽질로 인한 피로감이 역력하다. 그곳은 어느 날 가봤더니 빌딩 숲으로 완성된 풍경들이 아니라, 작가가 20년 넘게 살아왔으며 졸업 후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지역에서 일어난 주변의 극적인 변모과정을 기록 한 것이다. 작가는 나대지와 개발된 풍경 등이 공존하는 공간들을 찾아다니며 시각적 자료들을 조사하긴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의 작업이 낭만적 폐허를 표현주의적 터치로 구현했다면, 요즘의 작업은 이전의 회화적 바탕 면 위에 출력된 종이로 접혀진 기하학적 이미지가 가세했다. 재개발을 예정하고 있거나 진행 중인 ‘어수선한 풍경’-이전 작업의 제목 및 부제이기도 함-은 쓸쓸함이라는 정서적 기조에,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의 지향인 ‘창조적 파괴’의 이면이 회화적이면서도 구조적인 양상으로 드러난다. 

가령 붉은 색 스프레이로 번지수가 아무렇게나 갈겨 써 있는 철거대상 가옥들이 등장하는 작품은 그의 풍경에 내재되어 있는 낭만적 잔재를 일소하는 듯하다. 갈겨 쓴 숫자는 한 장소들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사연들과 상징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 A4지에 레이저 출력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업한 이 작품은 전시장 모서리를 활용하여 108개의 작은 화면들을 2cm 간격으로 배열하였다. 서로 달랐을 주거 형태들은 같은 크기로 절개되어 기계적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그것은 재개발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구조적 동형성을 가진다. 누추한 벽들에 씌여진 어지러운 숫자들은 새로운 주거 상품의 번지수로 변모할 것이다. 종이배가 등장하는 회화들은 재개발 장소를 찍은 사진을 출력하여 배 모양으로 접고 이를 회화에 도입한 것이다. 대개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그 위에 접힌 형상이 그려진다. 바탕 면에서 언뜻 보이는 자연이나 인공적 구조물들은 종이 배 위에도 다시 등장하곤 하지만, 양자의 기하학적 위상은 큰 차이가 있다. 접지 술은 예견된 방식에 따라 접혀지면서 만나지 못할 것을 만나게 하고, 인접한 것들을 떼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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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일_풍경 108-8_디지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 가변설치_20×28.5cm×108_2009


그것은 시공간의 강력한 변화를 실행한다는 점에서 재개발의 과정과 비교된다. 뒤섞인 풍경들에는 언제 뿌리 뽑힐지 모르는 자신들의 운명도 모른 채, 때가 되어 핀 개나리나 목련 꽃들이 지천이다. 풍경이 화사할수록 삶의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지는 역설이다. 접혀진 기하학적 단면에 남겨진 이전의 풍경들은 배경에서 싹쓸이 당하는 붓질에 의해 더욱 급격하게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종이배의 접혀진 단면들에 이전 장면의 구상적 형태가 남아있는 반면, 바탕 면은 지워지고 뭉개지며 흘러내리는 안료로 인해 회화성이 강조되어 있다. 원초적 질료로서의 바탕과 기하학적 구성물이 대조된다. 그러나 형태 역시 종이배들이 기계적으로 얹혀 있다기보다는, 작품의 기조에 따라 정처 없이 떠내려가기도 하고, 풍경으로 돌진하기도 하며, 심연으로 침몰하는 듯도 하다. 박용일의 작품 속 서사는 등장인물이나 설명적 묘사 같은 재현주의에 의존하기 보다는 형식적 장치를 통해 실행된다. 이 형식적 장치는 실체나 본질보다는 차이의 유희에 의한 것이다. 거기에서는 복잡한 회화적 처리와 기하학적 위상변환이 이루어진다. 

회화적 에너지가 그대로 전달되는 바탕 면과 접혀진 풍경의 만남은, 자연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이 결여된 상호 이질적인 것들을 충돌시키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폐허에서 주어온 오브제 위에 그린 그림들에서 보여지 듯, 작가는 사람 사는 냄새가 작은 마을의 상실을 애도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있을 뿐이다. 재개발 예정 지구에는 실제로 사람이 없기도 하거니와, 사람이 등장하면 그림이 지나치게 설명적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접혀진 평면, 지워진 자국들은 사건이나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교란시키는 요소들이다. 접혀진 면들이 뜻밖의 장면을 보여주기도 하듯, 자신이 그림이 여러 각도에서 좀 더 다양하게 읽혀지기를 바란다. 소재적인 측면에서 그의 작품은 현실비판적인 요소가 있지만, 이러한 요소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거나 또 다른 차원으로 우회시키는 것은 작품의 형식적 장치들이다. 이러한 장치들은 인간 사회에 내재한 진실에 더 큰 울림을 부여한다. 그의 그림은 보이는 단면보다 더 많은 단면들이 중층적으로 접혀 들어가 있다. 특히 종이배는 흥미로운 소재이자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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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일_종이배 풍경_캔버스에 유채_80×117cm 2008


그것은 2007년에 구상한 것으로, 2008년에 ‘종이 풍경’이라는 부제로 전시를 열기도 했으며, 이번 전시도 그 연장 선 상에 있다. 『종이배 풍경』展은 작가 찍은 사진을 A4 사이즈의 종이로 출력해서 접은 것이다. 접은 종이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구도가 나오는데, 단면의 다양한 풍경은 풍경의 조각이자 단편이기도 하고, 도시계획에 의해 잘려진 구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배는 주거 공간과 같은 차원의 소우주를 상징하지만, 종이로 만들어진 배는 견고한 상징적 우주가 아니라, 가지고 놀다 버려지는 일회성 사물을 연상시킨다. 거기에다가 방향성 없이 떠밀려 다니는 표류까지 생각하면, 예쁘게 보일 수도 있는 종이배 풍경이 쓸쓸함과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떼어지고 접혀지고 떠다니는 종이배의 이미지는 유랑과 유목의 이미지를 공유한다. 유목이나 탈주는 억압적 체계로부터의 자유를 상징하는 시대의 코드가 되기도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유목은 엄연히 계급적 양상을 띤다. 기호화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보다 나은 기회를 위해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상층의 유목민과 달리, 취약 계층들은 ‘진짜’ 유목민처럼, 오직 죽어서야 그들의 터전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그의 종이배 풍경에는 떠남의 홀가분함이 아니라, 우울함이 내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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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일_종이배 풍경_캔버스에 유채_80.5×130.5cm_2009


종이배의 기하학적 형태와 대조되는, 지워지거나 흘러내린 자국이 그대로 남은 거친 바탕 면은 회화적 에너지가 직접 전달된다. 여기에서는 종이배 풍경의 특이한 구도에서 나오는 개념적인 재미보다는, 이전의 붓질이 마르기 전에 실행해야 하는 속도감과 호흡이 더욱 중요하다. 또한 ‘어수선한’ 풍경에 적용된 속도감 있는 붓질은 개발을 위한 그럴듯한 가림 막과 중첩되기도 하고, 현대의 이동 속도에 의해 간과되는 풍경을 상징하기도 한다. 박용일의 그림에는 자연발생적인 동네가 인공 도시로 재구성되기 위해 가해지는 힘이 내포되어 있다. 전경의 옥수수 대와 원경의 아파트촌을 대조시킨 이전의 「어수선한 풍경」시리즈에서는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졌다면, 「종이배 풍경」은 모든 것을 침수시키고 쓸어버리는 물의 파괴적인 힘이 느껴진다. 그 힘은 바람이나 물처럼 자연력으로 은유되어 있지만, 접는 힘은 분명 인공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삶의 흔적이 켜켜이 남은 풍경들을 단번에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현대화의 진면목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지역의 재개발 장면이라고 특정하기 힘든 현대화의 보편적 측면이다. 

지우기와 흘리기가 빈번한 후경의 중첩적 화면, 전경에서 두드러지는 접기의 기하학은 시공간에 대한 재편집과 그것에 내재된 사회적, 역사적 함의를 해독하기를 요구한다. ‘시간이 연속의 질서이듯 공간은 공존의 질서’라고 주장한 라이프니츠의 말에 무색하게, 박용일의 작품 속 풍경은 시간적 연속성과 공존의 질서가 파괴되어 있다. 시간과 공간은 물리적인 것으로 주어지는 중성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의 역학관계에 의해 재편되곤 하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범주이다. 박용일의 작품에서 다양한 무늬들로 이루어졌을 삶의 거처들은 스트라이프 무늬의 가림 막으로 가려진 채 획일적인 패턴으로 변모할 준비를 한다. 작가는 무엇인가 파괴되었지만, 아직 새로 건설되지는 않은 중간 지대에서 서로 다른 삶의 의지가 충돌하는 것을 감지한다. 대개 개발은 그곳에 원래 살았던 많은 이들의 생활환경 개선이 아니라, 소수에게 집중될 이해관계가 관철되는 수단이 된다. 구체적 삶의 무정형성과 불투명성을 삭제하고, 곧 반듯반듯한 격자화로 완성될 그곳에 새로 자리할 질서는 기호화된 시공간이다. 


정부든 기업이든 거대 조직의 힘이 보다 순조롭게 관철되기 위한 시공간의 재편은 자연적 시공간의 좌표를 파괴한다. 서울 근교의 개발은 대개 자연발생이나 자생이 아니라, 거대한 소비 타운을 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삶의 구체적 흔적들은 일소해야할 유물이 되어 버린다. 이전의 불규칙한 삶의 덩어리들은 가는 체로 걸러진다. 일정한 크기로 출력되거나 종이배로 접힌 장면들은 일련의 계획을 통해 분절화 되어 있는 시공간을 예시한다. 현대적 체계에 의한 분절화는 보다 나은 생산성을 위한 것이라고 가정된다. 국지적이고 다양한 공간을 격자형 구조로 변모시키는 이러한 개발은 모종의 기능주의를 앞세우지만, 이러한 작은 미덕은 더 큰 목적인 이윤의 배타성 앞에 무너지곤 한다. 박용일이 십 수 년 째 지속하고 있는 그림들은 서울 외곽지역의 삶까지 구석구석 자본에 점령되는 과정들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시공간의 압축이다. 장면을 들어내고 접고 재배치하는 박용일의 작업이 내포하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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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일_풍경-스트라이프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9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갈수록 높아지는 시공간 압축의 강도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변동을 연관시킨다. 그것은 동시에 주체와 객체를 동질화 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추상화 시키는 현대화의 흐름을 나타낸다. 이러한 흐름은 장소들을 살고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사고 팔고 통과하는 곳으로 변형시킨다. 시공간의 균질화와 욕망의 획일화는 멈추지 않는 생산물이 소비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형성한다. 끝없는 생산과 파괴는 자본주의의 과잉축적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고층 빌딩 화 된 주거공간은 더 많은 에너지와 물질을 소비해야하고, 그렇기 위해 지배적 가치와 동질적 질서로의 편입은 필수적이다. 박용일의 풍경은 땅과 이웃, 과거와 단절시키는 파괴적인 힘을 그리고 있다. 하비는 공간을 통제하고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분쇄와 분절화를 통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마을에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존재하는 완충 지대가 존재하지만, 이러한 존재론적 안전을 보증하는 잠재적 공간은 화폐나 신용 같은 추상적 체계로 대체된다. 그것은 마을이 가진 온기와 도시가 가지는 한기의 차이이다. 삶의 추상화는 화폐의존도를 높인다. 분절화는 자본의 순환을 가속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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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일_종이배 풍경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9


박용일의 종이배는 시공간을 분절화 시키는 어떤 힘-한편으로 진보적이고, 그 이면은 파괴적인-을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카오스의 대해처럼 보이는 바탕 면에 던져 놓거나 띄워놓음으로서, 그 역시 또 다른 순환 주기로 밀어 넣는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촌들은 방금 헐린 주거지보다 더 짧은 시간 밖에 존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회전주기에 의해 직접 영향을 받는 상품은 오래된 사물보다 지속 연한이 더욱 짧다. 그의 작품은 상품(집을 포함)의 생산과 소비주기와 그보다 더 긴 어떤 장기지속의 시간대가 공존한다. 단선적으로 진보하는 현대적 시간은 다양한 공간을 파괴한다. 그것이 ‘시간의 공간화’(프레드릭 제임슨)이다. 이러한 비전에 의하면, 박용일의 예측대로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서울에서 파주까지 아파트의 행렬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새 주거지의 중심에 놓이는 대형 쇼핑몰들은 일상적인 삶의 주기를 더욱 획일화 시킬 것이다. 인간이 아닌 소비자가 어떤 시간에 어떤 공간에 위치하는지 예측하고 이를 조절하는 것은 자본의 요구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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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일_종이배 풍경_캔버스에 유채_112×162cm 2008


박용일의 그림에서 바람, 물 같은 자연력으로 비유된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은 자본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컨베이어 벨트 같은 현대적 생산의 질서를 넘어서는 함의가 있다. 더욱 가속화되는 시간은 ‘공간의 시간화’(폴 비릴리오)도 야기하기 때문이다. 공간의 시간화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기가 사는 아파트 벽면에 브랜드 이름을 새겨 넣고, 밤에는 상점 간판 같은 조명시설을 켜기 시작하는 한국의 초고층 주거지들은 공간을 인터페이스로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물리적 구조들은 기호가 명멸하는 공간이 된다. 주거공간은 삶의 터전이라는 상징이나 기능을 만족시켜주는 사용가치를 넘어서, 교환가치 더 나아가 기호 가치의 담지자가 된다.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기호와 공간의 경제』에서 (탈현대적)기호 가치는 (현대적)교환가치보다 훨씬 더 추상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에 의하면, 교환가치가 한 객체의 가치는 양화 가능한 가격단위나 일반적 효용으로 계산될 수 있다는 식의 문제라면, 기호 가치는 한 객체가 지닌 이미지 속으로, 말하자면 무엇이든 흡수하는 가운데 계산의 가능성마저 무너뜨린다. 

점점 더 생산되고 있는 것은 물질적 객체가 아니라, 기호이다. 재개발을 통해 상품화된 주거지는 종종 상표화 과정을 통해 기호가치의 속성을 띠게 된다. 박용일의 접지 술이 내포하는 기하학적 위상은 예기치 못한 것을 한 공간에 이합집산 시킨다. 이러한 과정은 물리적 공간이 점차 인터페이스로 변모되는 현대적 환경과 유사하다. 폴 비릴리오는 『과잉 노출된 도시』에서 지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시들이 스크린이나 인터페이스, 단말기 같은 움직이는 표면으로 환원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거리와 깊이는 일련의 시간이 흘러가는 표면이 된다. 그것은 시간의 통합성이 따르지 않는 공간의 통합성을 보여주며, 도시는 기술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시간 체제 속으로 사라져간다. 박용일의 그림에서 중첩되고 접혀진 공간은 하나의 재현적인 화면으로는 담을 수 없는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공간은 속도(시간)가 된다. 무엇보다도 단숨에 완성되어야 하는 속도감 있는 바탕 화면의 처리방식이 그러하다. 그림 속의 폐허나 종이배는 애틋한 과거나 추억, 또는 지금으로서는 근거 없어 보이는 어떤 희망을 향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형식적인 함의에 있어서는 맹목적인 시간의 가속화에 정처 없이 내맡겨진 (탈)현대적 삶의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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